이것 저것

장보고

백두(흰머리) 2007. 9. 19. 11:48

해상왕 장보고의 일대기

 

 

 

  장보고는 전라도 완도 출신의 천한 태생이다. 어릴 때는 궁복이라고 불렸다. 궁복은 섬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어릴 때 부터 뱃사람이 되었다.

  그 당시 당나라 상인들은 물건뿐만 아니라 가난한 신라 백성의 아들딸들도 사가지고 가서 노예로 팔아 넘겼다. 이런 짓거리를 자주 보던 궁복은 분하고 억울하였다. 당나라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 같은 짓거리를 보고만 있는 나라에 대해서도 분하고 억울하였다. 그렇다고 미천한 궁복이 어찌할 수 있는 힘도 없었다. 그렇다면 자기가 벼슬을 해야 힘이 있을 텐데 신분이 미천하여 벼슬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웃에 사는 정년(鄭年)이와 함께 당나라로 떠나게 되었다.

  당나라 등주로 건너간 궁복과 정년은 곧 당나라의 군대에 들어갔다. 워낙 힘과 재주가 출중한 궁복은 무녕군(武寧軍) 소장까지 벼슬이 올랐다.

  이를 전해들은 신라에서는 궁복을 불러 장군으로 삼으려했으나 귀족들이 "미천한 출신의 궁복을  장군으로 삼는다는 것은 불가 합니다"하여 장군이 되지 못하였다.

  이때 신라에서는 여전히 신라 사람을 잡아다가 당나라로 데려가 종으로 팔아 먹는 일이 빈번하였다. 이를 보다 못한 궁복은 신라로 돌아와서 흥덕왕에게 신라 사람을 잡아다가 당나라로 데려가 종으로 팔아 먹는 일이 여전하니 단속하여 줄 것을 말하니 흥덕왕은 궁복에게 해결방안을 물어 지금의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궁복을 청해진 대사로 임명하여 외국의 배들을 잘 감독하고 감시하게 하였다.

  궁복은 이름을 중국식인 장보고라고 고쳐서 사용하고, 신명을 바쳐 바다를 지켜 당나라의 해적들 뿐만아니라 '해상왕'으로서의 역할을 다하였다.

  836년 12월, 재위 11년만에 흥덕왕(왕자가 없음)이 세상을 떠나자 왕족인 김균정과 조카 김제융의 피비린내 나는 왕위 쟁탈전이 시작되었다. 온종일 싸운 두 파는 결국 김균정이 화살에 맞아 죽음으로써 막을 내렸다.

  싸움에 이긴 김제융이 바로 제43대 희강왕이다. 김균정의 아들 우징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고심 끝에 장보고를 찾아갔다. 이 당시 장보고의 세력은 신라에서 제일가는 세력(사병 1만명이 넘음)이었다. 이에 장보고는 우징의 간청을 들어 그를 보호해 줄 것을 약속하였다.

  3년이 흘렀다. 삼촌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희강왕 역시 자기를 추대하였던 김명이 자기 공을 내세워 횡포를 부렸다. 사람 욕심은 끝이 없나 보다.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왕위를 욕심내어 심복 김귀, 김헌승과 더불어 모의를 꾸며 희강왕을 몰아 내 버렸다.

  "아아! 이렇게 덧없는 왕위를 뭣 때문에 탐내었던가? 더구나 숙부까지 죽여가면서!" 탄식하던 희강왕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렸다.

  김명은 희강왕이 죽자 좋아서 왕위에 올랐다. 이가 재위 1년의 민애왕(閔哀王)이다.

  이 소식은 멀리 청해진에도 전해졌다. 희강왕의 아들 우징은 민애왕을 몰아내고 자기가 왕이 되고자 장보고에게 힘을 빌려 줄 것을 간곡히 청하였다. 이때 장보고는 머리를 번뜩 스치는 것이 있었다. 우징의 말을 들어주어 성공하면 우징의 아들(경응)과 평소 다정한 사이인 딸(난화)을 왕비로 삼아 왕족이 될 수 있는 좋은 기회임을 알게 되었다. 장보고는 우징으로 부터 아들과 정혼을 담보로 승낙하고, 어릴적 친구인 정년과 심복인 염장, 장변 등 장수들을 이끌고 도성으로 진격하여 손 쉽게 도성을 차지하였다. 그리하여 839년 4월, 우징은 신무왕(神武王)이 된 것이다. 우징은 민애왕을 월유궁(月遊宮)에 가두어 죽였다.

  우징은 자기를 도운 사람에게 벼슬을 내렸다. 그러나 장보고에게는 감의군사(感義軍使)라는 칭호 이외는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그래도 장보고는 불평하지 않았다. 오직 딸 난화가 왕비가 되어 아들을 낳기만 하면..........

  그러나 신무왕 역시 재위 겨우 7개월 만에 등에 종기가 나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말았다.

  뒤를 이어 태자 경응이 왕위에 오르니 이가 문성왕(文聖王)이다. 경응은 장보고에게 진해 장군(鎭海將軍)이란 벼슬과 관복 한 벌을 하사한 후 난화를 둘째 왕비로 맞이할 의논을 하였다. 그러나 귀족들의 반대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제나 저제나 기달려온 청해진의 장보고는 귀족들의 반대로 딸이 왕비가 될 수 없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이끌고 곧 쳐들어 갈 기세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대궐은 걱정이 태산이었다. 이때 희강왕을 치러갈 때 장보고의 심복이었던 염장(궁궐에 머물러 있었음)이 꾀를 내어 장보고를 물리 칠 방도를 얘기하니 문성왕은 기뻐하며 염장을 청해진으로 보냈다.

  아무것도 모르는 장보고는 염장의 방문을 받고, 둘이 한 잔하였다. 염장은 자기는 먹는 체하고 장보고에게 계속 권하여 취한 장보고가 쓰러져 잠이 든 틈을 이용하여 칼로 찌르려는 순간 옆방에서 혹시나 무슨 좋은 소식을 가져왔나 하고 쳐다보던 딸 난화가 깜짝놀라 소리 쳤으나 이미 가슴에서 피가 용솟음치며 뿜어 나오고 있었다.

  난화도 그 칼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해상왕 장보고는 이렇게 생을 마감하였다.

                                

        

  일장춘몽이로다.

  그 놈의 욕심!

  술이 문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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