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차(좌석리-고치령-국망봉-비로봉-삼가리)
언 제 : 2011.11.13(일)
누구랑 : 대자연산악회와 함께
거리 및 소요시간 : 약20km, 7시간 소요
특기사항 : 비로봉에서 삼가리까지는 접속구간으로 약6km이다.
출발하기 전에 한 방 찍고!
좌석리에서 고치령까지는 트럭을 타고 올라간다.
찬 바람을 맞으며 트럭에 실려 올라가는 모습이 영 그렇다.
고치령이다.
고치령의 유래
고치령은 왼쪽으론 국망봉, 오른쪽은 마구령 박달령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길목이다. 강원, 충청, 영남 등 기호지방을 드나드는 고갯길은 죽령과 고치령, 마구령이 있다. 하지만 서낭당이 있는 곳은 이곳뿐이다. 이 서낭당은 단종을 태백산 산신으로, 금성대군을 소백산 산신으로 모시고 있다.
고갯길을 두고 앞뒤로 흐르는 계곡수는 피로에 지친 길손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활력소다. 정상을 깔딱 넘어 100m쯤 가면 무색, 무미, 무취의 샘물을 만날 수 있다. 천연의 물맛이다. 여기서 길손들은 목을 축일 수 있다. 한 시간쯤 내려가면 전망이 시원하게 트인다. 하늘 아래 첫 동네인 마락리다. 신라와 고려 때 군마를 키우던 장소다. 그래서 말쏘, 죽통골, 멍에골 같은 관련 지명이 많이 남아 있다.
고치령(古峙嶺`770m)은 동국여지승람 영천군 산천조와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등에 따르면 ‘관적령’(串赤嶺)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는 고치령의 소리 옮김 표기로 같은 이름이다. 串의 음 ‘곶’과 赤의 일음(一音) ‘치’로 소리 옮김한 곶치령이 고치령으로 바뀐 것이다. 이 길은 경북의 행정, 문화 중심지 중 하나였던 순흥도호부(현 영주시 순흥면 소재)를 연결하고 낙동강과 남한강 수운을 연결하는 지점이었기 때문에 중요한 길이었다. 그러나 이 길이 기억에서 사라진 것은 단종애사와 관련이 있다.
◆금성대군과 단종
세종대왕의 아들이며, 수양대군의 동생인 금성대군은 사육신들과 단종복위운동에 연루돼 유배지를 떠돌다가 마침내 흥주도호부(순흥의 옛 이름)로 옮겨 오면서 고치령과 인연을 맺게 된다.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이 소백산 너머 영월군 청령포로 안치되면서 금성대군은 조카인 단종의 복위를 위해 순흥부사 이보흠과 영남 선비들을 모아 단종 복위 운동을 꾀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밀사들을 파견, 청룡포까지 소식을 전했던 것. 또 금성대군 역시 조카인 단종이 보고 싶을 땐 야밤을 틈타 영월 청룡포를 다녀왔다고 전해지고 있어 고치령은 금성대군과 밀사들이 오갔던 비밀 통로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단순히 보부상들이 물류를 수송하기 위해 넘던 고갯길이 아니다. ‘단종애사’의 슬픔을 간직한 한(恨) 많은 고갯길이다.
단종 복위를 위해 이 고개를 넘나들던 수많은 밀사들의 수고와 노고는 한 노비의 밀고로 실패로 돌아갔고 금성대군과 단종은 죽임을 당했다. 흥주도호부(현재 영주시 순흥면) 역시 몰락했다. 바로 정축지변이다.
당시 흥주도호부는 30리 안에 사람을 볼 수 없었고 죽은 사람들의 피가 죽계(竹溪)천을 따라 십여 리를 흘러내렸다고 전해진다. 현재도 피의 흔적이 끝난 마을을 ‘피끝 마을’(영주시 안정면 동촌리)이라고 부를 정도로 당시 상항이 처참했음을 짐작케 한다.
정축지변 이후 200년이 지나 숙종조에 순흥도호부는 환복됐고, 이후 매년 봄, 가을(음력 2월, 8월) 향사가 열리는 금성대군 신단, 조선 유학의 중심이자 민족교육의 산실인 백운동 서원(소수서원) 등이 들어서 다시 과거의 영화를 회복했다.
훗날 영주 사람들은 살아서 못 만난 조카와 삼촌을 죽어서라도 만날 수 있게 하기 위해 북쪽 영월에서 죽은 단종을 ‘태백산 신령’, 남쪽 순흥땅으로 유배됐다가 안동땅에서 죽은 금성대군을 ‘소백산 신령’으로 받들어 소백과 태백 사이의 양백지간(兩白之間)에 산신각을 지어 금성대군과 단종의 영혼이 만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준 것이다. 아담한 산신각에는 태백산 신령인 단종과 소백산 신령인 금성대군이 함께 모셔져 있다.
그래서 고치령 서낭당은 재 아랫마을 사람들에게는 단순한 고갯길이 아닌 정의로운 세상의 염원을 실현시켜 줄 통로로 기억되고 있다. 사람들은 매년 정월 열 나흗날이면 서낭당 산신제도 지낸다.
금창헌 소수박물관장은 “당시 부석, 순흥, 풍기, 영주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이 산신당을 찾아와 치성을 드렸고 현재도 기도발이 잘 받는다는 이유로 전국 각지에서 치성을 드리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며 “서낭당은 자물쇠가 채워지는 날이 없다. 6`25때 화재로 피해를 입었을 당시 이곳 사람들은 군수와 서장의 도움을 받아 서낭당을 다시 지을 정도로 애착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퍼온 글입니다)
여기서 국망봉까지 11.1km이다.
열심히 걷고 있는 일행들
낙엽이 수북히 쌓인 산길을 걷는다.
참 좋다.
바스락~!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참 좋다.
혼자여서 더 좋다.
벌더덩 눞고 싶다.
이처럼 멋진 모습 혼자보기 아깝다.
말 없이 혼자서 걷는다.
선두들은 벌써 식사를 마치고 출발하고 있다.
이화우님이 가져온 수육과 맥주를 한잔하면서 점심을 먹었다.
산이라서 그런지 차갑다.
손이 시렵다.
철쭉나무가 내년을 위하여 열심히 준비하는 것 같다.
국망봉 주변의 철쭉 군락지
멋진 풍경을 사진에 열심히 담고있는 나와 이화우
마루금과 나목!
?
!
.......
내가 가야할 곳이다.
국망봉에 도착
국망봉
충청북도 단양군 가곡면과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에 걸쳐 있는 산. 높이 1,421m. 태백산맥에서 갈라져나온 소백산맥의 머리부분으로 도솔봉(兜率峰)·연비봉(燕飛峰)·형제봉(兄弟峰)과 더불어 영동·영남·영서지방을 구분한다.
동사면은 낙동강 상류의 지류, 서사면은 남한강 상류의 지류가 발원하는 양대하천의 분수령이 되고 있다. 산이 깊고 부근에 절이 많으며 동남쪽 산록에 있는 석천폭포(石川瀑布)와 초암사(草巖寺) 부근은 경관이 수려하나 교통이 불편하여 개발되지 못하고 있다.
신라 말 경순왕이 신라의 국운이 기울어 고려에 자진하여 항복하자 이에 반대한 마의태자(麻衣太子)가 속세의 영예를 버리고 은거지를 찾아 금강산으로 가는 도중 이 산에 당도하여 옛 도읍인 경주를 바라보며 망국의 눈물을 흘렸다 하여 국망봉이라 칭하였다.
국망봉에서 비로봉으로 가는 길에
나와 이화우가 세찬 바람을 맞으며 비로봉으로 가고 있다. 산양님이 찍어준 작품이다.
가다가 사진도 한 방 찍어보고
바람이 장난이 아니었다. 볼때기가 시려워서 혼났다.
걷고 또, 걷고, 걷는게 수행이다.
참 이쁘구나!
비로봉 도착
랜턴을 가지고 오지 않아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죽자 사자 앞만보고 내려왔다. 오후6시가 조금 넘었다. 산은 어둠이 빨리 찾아온다.
선두들은 일찍 내려와 한 잔하느라 여념이 없다.
약7시간의 산행
오늘도 빡센 산행이었다.
보람찬 하루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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