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의 글귀
<가을에 버려진 조롱박처럼
잿빛으로 퇴색한 뼈를 보라.
그것들을 보고 어찌 즐거워하겠는가?
뼈를 쌓아 올리고
살과 피를 발라놓은 이 몸속에
늙음과 죽음과
자만과 위선이 감추어져 있다.>
~법륜 스님의 설교~
제가 행복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요. 제가 이야기하는 행복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열반을 뜻합니다. 열반은 괴로움이 없는 경지, 괴로움이 사라진 경지입니다. 이러한 행복은 마음이 들뜨는 기분 좋음, 즐거움과는 성격이 달라요. 그런데 우리는 대개 들뜨는 마음, 기분 좋음, 즐거움을 행복으로 삼기 때문에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마치 자석에는 늘 N극과 S극이 함께 있듯이 즐거움의 이면에는 반드시 괴로움이 따라다닙니다. 즐거움이 높으면 높을수록 그로
인한 괴로움 역시 깊어지고, 고락의 윤회를 반복하게 됩니다.
기분 좋음을 행복으로 삼으면 기분 나쁨의 괴로움이 늘 따라올 수밖에 없습니다. 인도의 세계관에서는 즐거움이 극에 달한 상태를 천상, 괴로움이 극에 달한 상태를 지옥이라고 표현했어요. 즐거움과 괴로움 사이를 계속 돌고 도는 윤회가 곧 천상과 지옥을 돌고 도는 윤회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를 두고 ‘윤회전생(輪廻転生) 한다’고 말합니다. 윤회전생(輪廻転生)에서 벗어나려면 즐거움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즐거움에 집착하면 필연적으로 괴로움이 따라옵니다. 즐거우면 심리가 들뜨고, 반대로 괴로우면 심리가 가라앉습니다. 즐거움과 괴로움은 마음을 편안하게 유지하면 피할 수 있어요. 평정심을 유지하면 마음이 들뜨지 않기 때문에 가라앉음도 자연적으로 막아집니다.
우리의 마음은 바닷물처럼 외부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따라 풍랑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마음 작용의 원리를 알고 자꾸 평정심을 유지하는 경험을 쌓으면 마음이 잔잔한 호수처럼 차분해집니다. 아예 즐거움과 괴로움이 일어나지 않는 거울과 같은 마음이 되면 좋지만 아직 우리에게는 도달하려고 하는 목표입니다.
그 목표점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현실적으로 도달 가능한 상태는 잔잔한 호수에 물결이 일어나듯이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호숫가에서는 물결이 일어나도 배가 흔들린다거나 해변가의 모래가 휩쓸려가는 일이 없습니다. 이러한 상태를 평정심이라고 합니다.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 그래서 괴로움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열반(涅槃, Nirvana)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지고(至高)한 행복’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지고한 행복’은 즐거움을 행복으로 삼지 않고, ‘괴로움 없음’을 행복으로 삼습니다. 지고한 행복을 누리려면 첫째, 마음이 들뜨지 않고 평정한 상태를 가져야 하고, 둘째, 즐거움과 괴로움에 휩쓸리지 않아야 합니다. 불교 수행의 목표는 내가 어떤 것을 보고, 어떤 것을 듣고, 어떤 것을 냄새 맡고, 어떤 것을 맛보고, 어떤 것을 감촉하고, 어떤 생각을 하더라도, 그 경계에 휩쓸려서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하거나, 울거나, 금방 기뻐했다가 슬퍼하거나, 즐거워하거나 괴로워하지 않고 늘 편안한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열반(涅槃)’이라는 용어를 일상에서 쓰는 단어 중 무엇에 가장 가까운지를 생각해보면 그나마 ‘행복’이 가장 가깝습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행복’은 주로 즐거움을 의미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행복’과 세상에서 말하는 ‘행복’의 의미가 다른데 동일한 용어를 계속 사용하다 보니 혼동이 생기고 있어요.
태어남도 죽음도 없는 도리
삶과 죽음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자연을 보면 땅에 씨앗을 심으면 싹이 트고, 자라고, 꽃이 피고, 죽으면서 씨앗을 남기면 다시 싹이 트고 자라는 과정을 반복합니다. 여기에 열매가 맺혔다고 좋아하지도 않고, 죽었다고 슬퍼하지도 않습니다. 화분에 심은 씨앗이 꽃을 피웠다가 흙으로 돌아가고, 다시 피었다가 흙으로 돌아가고, 또 피었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것에도 변화만 있을 뿐 여기에는 어떠한 사라짐이라는 것도 없고 생겨남이라는 것도 없습니다.
마치 물결이 출렁거릴 때 파도를 보면 우리는 ‘파도가 생겨났다’고 하지만 사실 파도가 생겨났다고 할 것도 없고, 또 ‘파도가 사라졌다’고 하지만 사실 파도가 사라졌다고 할 것도 없습니다. 본질은 어떠한가. 그저 물결의 출렁거림이 있을 뿐입니다. 변화가 있을 뿐입니다.
자연 생태계에는 이처럼 다만 변화가 있을 뿐입니다. 이처럼 변화할 뿐이라는 걸 직시한다면 여기에는 그 무엇이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생겨난다고 표현하지만 실제로 생겨난다고 할 것도 없고, 사라진다고 표현하지만 실제로 사라진다고 할 것도 없습니다. 이걸 알게 되면 생겨난다고 기뻐할 일도 없고, 사라진다고 슬퍼할 일도 없습니다.
왜 기쁨과 슬픔이 생길까요? 변화의 한 측면만 보고 ‘생겨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쁨이 일어나고, 변화의 한 측면만 보고 ‘사라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슬픔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실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잘못된 인식, 오류 때문에 빚어지는 일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 자신이나 사람에 대해 특별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연현상과 다르다고 생각하고, 우리 존재에 뭔가 특별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죽으면 다 사라진다’는 말도 맞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죽는다’는 표현 자체가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태어난다’는 말도 맞지 않습니다. 태어남과 죽음도 실제로는 하나의 현상일 뿐입니다. 연속되는 수많은 현상 중 한 단면일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생겨난 것은 영원히 변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명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것은 한 번 핀 나뭇잎이 영원히 피어 있고, 한 번 핀 꽃이 영원히 피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아요. 이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잘못된 생각 때문에 괴로움이 생겨납니다. 사람이 늙고 죽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 잘못된 생각에 집착하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오늘 읽은 경전 ‘가을에 버려진 조롱박처럼 잿빛으로 퇴색한 뼈를 보라’는 구절은 ‘사실을 직시하라’는 의미입니다. 무덤가에 가서 버려진 시신들을 보면 우리가 즐겁다고 할 게 뭐가 있겠어요? 여기서 핵심은 ‘즐거워할 게 없다’가 아니라 ‘괴로워할 일이 없다’입니다. ‘즐거워하지 말라’가 아니라 ‘사실을 알면 즐거워할 것이 없다’, 그리고 ‘사실을 알면 괴로워할 것이 없다’는 겁니다. 주된 내용은 ‘즐거워할 일이 없다’가 아니라 괴로워할 일이 없다’가 핵심입니다. 괴로워할 일이 없어지면 즐거워할 일이 없어지고, 즐거워할 일이 없는 줄 알면 괴로워할 일도 저절로 없어집니다.
육신은 태어나고 자라고 늙고 병들고 죽어갑니다. 늙고 병드는 것도 삶의 한 과정입니다. 나고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은 수많은 변화의 한 현상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영원히 늙지 않고, 영원히 병들지 않고, 영원히 죽지 않고 싶다는 헛된 생각을 하기 때문에 자만하고 위선이 생깁니다. 이러한 오류에 자만과 위선이 숨어서 자랍니다. 마치 그늘이 지고 습하면 그곳에 곰팡이가 생기는 것처럼, 이러한 우리의 잘못된 생각에 자만과 위선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교만하지 말고 겸손하라고 합니다. 동시에 비굴하지 말고 당당하라고 합니다. 수행자는 어떠한 숨김, 위선이 없어야 합니다. 뭔가 감추려고 하면 긴장해야 합니다. 그러면 평정심에서 멀어집니다. 있는 대로 진실 되게 살아가면 됩니다. 진실됨은 현실과 떨어져서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현실을 살아가면서 현실을 똑바로 직시하지 못하고 인식의 오류, 잘못된 생각으로 환상을 보고 살아가는데, 그 환상에서 깨어나는 것이 곧 진실입니다. 이렇게 현실을 올바르게 인식하는 것이 진실이지, 숨겨진 진실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이러한 현실은 모두 거짓이고 진실이라는 것이 따로 존재하는, 뭔가 숨겨진 사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또 다른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요즘 읽고 있는 늙음과 죽음에 대한 경전은 얼핏 보면 인생을 너무 부정하는 것 같고, 자칫 허무주의에 빠져 허망하게 보라는 것처럼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경전의 의미는 삶을 허망하게 바라보라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지나치게 재물, 젊음, 지위, 즐거움 등에 집착하며 살아가니까 한 발 떨어져서 조금만 진실을 들여다보면 그렇게 집착할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걸 알면 인생을 괴로워하면서 살지 않아도 됩니다.
오늘 하루도 평안한 삶을 사시고, 일상이 정진하는 삶과 같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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